2014년 7월 23일 수요일

가상악기를 하나 개발중입니다.


코스트코에서 사온 호두 파이를 좀 먹으니 살 것 같다. 사면서 너무 달고 칼로리도 높아 고민했는데 지금처럼 머리를 혹사시킨 후에는 이만한 게 없는 것 같다. 당분이 혈관을 타고 뇌로 공급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전 회사 대표님과 가상악기를 하나 개발중이다. 재직 중에 개발하던 가상악기 프로젝트를 계속 붙잡고 있어보겠다곤 했지만 내 성격상 설렁설렁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두달 쯤 전 대표님이 가져온 KVR 오디오 가상악기 개발 대회 떡밥을 물면서 드라이브가 걸렸다. 제출 날짜가 일주일 남짓 남았고, 내 출국은 11일 남았다. 재미있지만 빡세고 빡세지만 재미있다. 많이 놀지를 못해 나 자신에게 서운하긴 하다. 그래도 내가 개발한 가상악기로 곡 쓰는 게 작은 소망 중 하나였는데, 곧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좋다.

2014년 7월 5일 토요일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2: 미국에 갑니다



작년 7월에 진로를 고민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요약하자면 나는 어려서부터 게임도 좋고 음악도 좋고 설상가상으로 프로그래밍도 재미있어져서 뭘 할지 고민인데 신생 가상악기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고민중이다 라는 내용이다. 글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다. 


대학원 원서도 넣어보고, 입사지원도 하고 하다가 '되는 쪽' 으로 가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결정하지 않으면 도대체 시작을 못하겠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대학원 유학 원서도 넣고 게임회사 지원도 하고 다 했다는 것이다. 이 중 신생 가상악기 회사가 일도 재미있을 것 같고 사람도 좋고 무엇보다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 11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솔직히 스타트업치고는 매우 괜찮은 조건에 계약을 해 준 것도 컸다.

사실 먼저 회사에 컨택한 사람은 나였다. 소프트웨어 악기(가상악기) 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궁금증이 커져만 갈 때 국내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 악기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산 가상악기는 Purity와 Ravity 이후로 명맥이 끊긴 줄만 알았는데 신생 회사에서 악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홈페이지를 이리저리 뒤져봤다. 회사 이름도 멋있고 홈페이지도 깔끔하니 멋있고 무엇보다 제품 때깔이 괜찮았다.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info 메일로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가상악기 만드는 게 너무 궁금하니 인턴이든 알바든 뭐든 시켜만 달라고. 

그리고 회사 대표님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장문의 답장을 받았다. A4용지 한장 반 정도는 될 것 같은 분량이었다. 당장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원한다면 메일을 통해 가상악기 개발을 어드바이스해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 번 메일을 주고 받다가 저녁 약속을 가지고 입사를 제의받았다. 나는 세 번째 멤버였고 회사는 아직 사무실도 없던 상태라 사무실 알아보는 것 부터 입주하는 날 청소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책상과 의자를 엉성하게 들여놓고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처음엔 유일한 프로그래머다 보니 책무가 막중해 긴장도 되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계획하고 만들어나가는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공부해서 개발에 도입을 했다. 무엇보다 하는 일이 악기 제작이다 보니 잡담을 하건 공부를 하건 회의를 하건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라는 점이 너무나 좋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회사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유는 복잡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확실한 건 그간 정말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또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것은 이상향이고, 나는 그것을 잠깐 맛 본 것이다 -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에 지원했던 대학원 결과가 나왔다. 마지막 강의로 유명한 랜디 포시 교수가 설립한 카네기 멜론 대학교의 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 (ETC)와, Princeton Review에서 2013년 최고의 게임 디자인 스쿨로 선정된 유타대학교의 Entertainment Arts & Engineering 두 곳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유타대학교의 게임 엔진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게임 엔지니어링 커리큘럼이 너무 좋아 지원할 때 부터 욕심이 났지만, 여러모로 고민하다 카네기멜론으로 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ETC 합격자 대상으로 선발하는 장학생에 선정된 것이 컸다.






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는 Masters of Entertainment Technology라는 2년짜리 석사과정을 제공하는데, 첫 학기 빼고는 딱히 정해진 커리큘럼이 없다. 나머지 세 학기는 Learning by Doing 이라는 모토 아래 죽어라 팀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사실 Learning & Earning by Doing 이 더 좋긴 한데.)



작년 첫 학기에 진행된 Building Virtual Worlds 수업의 발표&전시회 영상. 
BVW는 ETC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수업이다.


정해진 커리큘럼도 없는 주제에 카네기멜론답게 학비는 엄청 비싼데, 다행히 한 학기에 한 두개의 선택 과목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아마 컴퓨터공학과 수업을 주로 듣게 될 것 같다. 컴퓨터공학 전공자가 카네기멜론에서 컴퓨터공학 수업을 안 들으면 손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학과 아웃풋이 좋다. 지금처럼 신선한 비주얼과 참신한 게임플레이의 캐주얼게임이 많지 않을 때 월드 오브 구 World of Goo 로 대박을 치신 분들이 ETC 출신이다. 이외에도 2013년 올해의 게임을 휩쓴 라스트 오브 어스 Last of Us의 총 감독 Neil Druckmann이 ETC 출신이며, 올해 Museum of Simulation Technology로 인디게임페스티벌 학생부문 본선에 오른 친구들은 현재 ETC 학생이다. 한국인 졸업생으로는 게임회사 로드컴플릿의 배정현 대표와 배수정 이사가 있다.


ETC 초기의 졸업생들이 만든 게임 월드 오브 구

말이 필요없는 명작 라스트 오브 어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ETC 출신이다


현 ETC 학생들의 프로젝트 Museum of Simulation Technology.
아이디어와 그것을 구현해낸 능력 모두가 예술이다.
(2014년 인디게임페스티벌에서 학생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합격한 다른 학교인  University of Utah EAE 학생들의 게임도 
나란히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그래서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8월 3일 출국을 하여 공부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다. 애초의 목적은 북미나 캐나다의 메이저급 게임 제작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표를 너무 확실하게 설정해 놓으니 압박감에 숨이 가빠오고 머리가 아프더라.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아무튼 무엇을 하던 최종 목표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것이다. 필요할 땐 돌아서 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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