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1일 토요일

음악을 언어로 환산한다면


보스톤 퀸시마켓 식당가에 마련된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민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음악적 능력을 다른 단위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가 될까? 자연스럽게 떠오른 척도가 언어였다.

나는 리듬, 박자, 음정 등 기본적인 음악 이론은 알고 있으니 언어로 치면 주어나 동사 형용사 정도의 기본적인 문법은 아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악기를 연주하는 기술은 아마추어니 발음은 어설픈 것이고, 기교나 스케일도 많이 알지 못하니 단어도 그렇게 많이 아는 편은 아니겠다. 시간을 가지고 쓰고 찾아보고 공부하고 다듬으면 어느 정도는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원어민의 글이나 말과는 확연한 차이가 날 것이다.

음악적 리터러시(읽고 쓸 줄 아는 능력)를 요구하는 곳에서 일하는 것은 흥미롭다. 내가 일하는 하모닉스는 음악 게임을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인 만큼 수많은 사내 밴드가 있고, 작곡가가 사운드 디자인과 게임 디자인을 모두 맡는 일이 드물지 않다. 테스트 때문에 프로 드러머가 필요하면 부서에 상관없이 회사 곳곳에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럽게 음악적인 요소를 이야기하게 된다. 박자, 템포, 루프, 스케일, 코드, 조옮김, 조바꿈, 프레이즈... 막상 이들을 사용할 땐 이를 자각하지 못하지만 가끔씩 내가 가진 어눌한 음악 언어가 이곳에서 일을 할 때 필요하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음악은 기본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굳이 음악 이야기를 티내며 꺼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때도 있다. 왠만한 밴드나 음악이야 서로 다 알 것 같고 해서 딱히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그렇다. 게임의 오디오 엔진을 담당하는 나의 사수는 밴드 건즈 앤 로지즈의 레코딩 엔지니어로 일한 경력이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국사람이 굳이 한국사람과 한국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한국말을 공부하지 않는 것처럼 이곳에도 분명 그런 아이러니가 있는 것 같다.

2015년 6월 3일 수요일

근황 업데이트 - 보스톤 인턴쉽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지 1년이 되어 가는데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2: 미국에 갑니다) 그동안 블로그 글은 냉장고에 부탁해에 관한 걸로 달랑 한 개 썼네요. 지금은 방학이라 시간이 좀 나서 간만에 근황 업데이트나 할까 합니다.

카네기멜론대학교 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에서의 첫 학기와 두 번째 학기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바빴습니다. 한국에서도 학교 다닐때야 늘 바빴지만 ETC에서의 지난 두 학기는 정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바빴어요. 첫 학기는 Building Virtual Worlds 수업을 들으면서 게임 다섯 개를 만들었고, 그 중 세개를 학교 페스티벌에 출품했습니다. 저의 잡학이 게임 디자인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기였던 지난학기엔 제 아이디어를 가지고 팀을 구성하여 한 학기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정말로 미칠 듯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개발을 주도해볼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습니다. 그 결과물은 올해 Indiecade를 비롯한 여러 게임 관련 페스티벌에 출품 예정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그때 되면 공개하겠습니다.

참 올해 1월에는 이틀만에 게임을 만들어 내야 하는 Global Game Jam에 참가해 학교친구 두 명과 함께 The Beat, the Step, and the Cowboys라는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이걸 GameJolt.com 에 무료로 배포했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다운로드YouTube에 게임플레이 비디오도 올라왔고, 가장 유명한 게임 매거진 중 하나인 Rock, Paper, Shotgun에서도 다뤄졌습니다. 처음 유튜브 비디오와 이 기사를 봤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네요. 국적도 나이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만든 게임을 하고 좋아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이 게임은 앞으로도 짬을 내서 개발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여름방학인 지금은 기타 히어로와 락밴드 시리즈의 개발사인 Harmonix Music Systems에서 오디오 엔지니어링 인턴을 하고 있습니다. 가상악기를 개발한 경력과 지난학기에 음악게임을 만든 것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네요. 실제로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회사 자체 엔진에도 웨이브테이블 신서사이저가 포함되어 있고요. 음악과 게임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참 얄궃게도 음악게임을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네요.

그리하여 저는 8월까지 보스톤에서 머무릅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그야말로 폭풍같았던 ETC에서의 지난 두 학기와 인턴쉽 경험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룬 글을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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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1일 일요일

EDM 대첩















요즘 한식대첩을 재밌게 보다가 삘받아서 만들어 봤다

2015년 5월 26일 화요일

<냉장고를 부탁해> 의 게임 디자인


요즘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 를 즐겨 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대체 왜 이렇게 재미있을까? 역주행하면서 발견한 것은 제작진이 처음부터 끊임없이 규칙을 수정하고 프로그램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 지금까지 왔다는 것이다. 오늘 지누션 편을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처음부터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번 화에서 지누는 대결이 끝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사실 제가 퓨전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해요."

김풍은 이를 모르고 퓨전 음식을 만들었다가 패배했는데, 이거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닌가? 지누가 이 사실을 미리 말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괜찮다. 왜냐면 판정이 게스트 한 명의 취향, 말 그대로 개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건 심사위원단이 결정한 것도 아니고, <나는 가수다> 처럼 판정단 500명이 투표를 해서 결정한 것도 아니다. 그냥 '내 맘'이다. 결과가 석연치 않다고 서명운동을 하거나 시청자게시판을 분주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이 시스템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프로그램에 숨통을 마련해 준다. 이름난 요리사인 샘 킴이 만화가 김풍에게 자꾸 쓴 맛을 보고, 40년 경력의 이연복 셰프가 패배해도 괜찮다. 게스트의 판정이 큰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셰프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조금 날 수는 나겠지만, 김성주와 정형돈이 끊임없이 깐족거리면서 잔치 분위기를 형성해 심각할 틈을 안 준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초기 <냉장고> 는 셰프들이 두 냉장고 중 하나를 선택하여 팀을 짜고, 각 냉장고에서 한 명씩 대표가 나와 대결을 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게스트가 자신의 냉장고를 선택한 셰프들을 포켓몬처럼 내세워 대결을 하는 셈이었다. 승패는 게스트를 제외한 사람들이 음식을 맛본 후 투표로 결정하고, 승리한 셰프가 속한 팀의 게스트는 두 요리를 모두 먹고, 패배한 팀의 게스트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그림이 썩 좋지 못했다. 두 게스트의 냉장고 속 재료가 승패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순 있지만, 대결한 것은 두 셰프인데 그 결과는 게스트들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요리가 패배하여 입맛만 다시는 게스트의 모습은 셰프의 어깨에 과한 중압감을 더했고, 이는 현장 분위기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때문인지 3회부터는 게스트들도 음식을 함께 먹고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쳐 두 셰프가 동일한 냉장고의 재료로 대결을 펼치고 냉장고 주인에게 평가를 받는 현재의 시스템에 정착하게 되었다.  참고

그 결과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규칙이 훨씬 간단해졌고, 판정을 철저하게 냉장고 주인의 취향에 맡기면서 대결이 가질 수 있는 중압감을 많이 덜어냈다. 역기획 (Reverse design, 최종 게임을 보고 그 기획 단계를 추론하는 것) 을 해보자면, 처음의 아이디어는 '두 냉장고의 대결' 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회당 게스트가 두 명인 것과, 한 라운드에 두 셰프가 1대1 대결을 벌이는 것도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 주제를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웠는지 9화까지는 '한 냉장고의 재료로 대결' 과 '냉장고간의 대결' 시스템을 혼합하여 사용했지만, 이후부터는 과감하게 본래의 기획 방향을 버리고 한 냉장고의 재료만을 가지고 대결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는 지난학기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게임을 디자인하면서 배운  '심플한 아이디어가 반드시 먼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라는 교훈을 상기시킨다. 심플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심플하고 좋은 아이디어는 여러 테스트를 통한 발견과 수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이다. 현재 <냉장고> 의 재미는 최선의 게임 디자인을 위한 제작진의 끊임없는 고민과 실험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