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6일 화요일

<냉장고를 부탁해> 의 게임 디자인


요즘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 를 즐겨 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대체 왜 이렇게 재미있을까? 역주행하면서 발견한 것은 제작진이 처음부터 끊임없이 규칙을 수정하고 프로그램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 지금까지 왔다는 것이다. 오늘 지누션 편을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처음부터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번 화에서 지누는 대결이 끝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사실 제가 퓨전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해요."

김풍은 이를 모르고 퓨전 음식을 만들었다가 패배했는데, 이거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닌가? 지누가 이 사실을 미리 말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괜찮다. 왜냐면 판정이 게스트 한 명의 취향, 말 그대로 개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건 심사위원단이 결정한 것도 아니고, <나는 가수다> 처럼 판정단 500명이 투표를 해서 결정한 것도 아니다. 그냥 '내 맘'이다. 결과가 석연치 않다고 서명운동을 하거나 시청자게시판을 분주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이 시스템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프로그램에 숨통을 마련해 준다. 이름난 요리사인 샘 킴이 만화가 김풍에게 자꾸 쓴 맛을 보고, 40년 경력의 이연복 셰프가 패배해도 괜찮다. 게스트의 판정이 큰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셰프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조금 날 수는 나겠지만, 김성주와 정형돈이 끊임없이 깐족거리면서 잔치 분위기를 형성해 심각할 틈을 안 준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초기 <냉장고> 는 셰프들이 두 냉장고 중 하나를 선택하여 팀을 짜고, 각 냉장고에서 한 명씩 대표가 나와 대결을 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게스트가 자신의 냉장고를 선택한 셰프들을 포켓몬처럼 내세워 대결을 하는 셈이었다. 승패는 게스트를 제외한 사람들이 음식을 맛본 후 투표로 결정하고, 승리한 셰프가 속한 팀의 게스트는 두 요리를 모두 먹고, 패배한 팀의 게스트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그림이 썩 좋지 못했다. 두 게스트의 냉장고 속 재료가 승패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순 있지만, 대결한 것은 두 셰프인데 그 결과는 게스트들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요리가 패배하여 입맛만 다시는 게스트의 모습은 셰프의 어깨에 과한 중압감을 더했고, 이는 현장 분위기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때문인지 3회부터는 게스트들도 음식을 함께 먹고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쳐 두 셰프가 동일한 냉장고의 재료로 대결을 펼치고 냉장고 주인에게 평가를 받는 현재의 시스템에 정착하게 되었다.  참고

그 결과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규칙이 훨씬 간단해졌고, 판정을 철저하게 냉장고 주인의 취향에 맡기면서 대결이 가질 수 있는 중압감을 많이 덜어냈다. 역기획 (Reverse design, 최종 게임을 보고 그 기획 단계를 추론하는 것) 을 해보자면, 처음의 아이디어는 '두 냉장고의 대결' 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회당 게스트가 두 명인 것과, 한 라운드에 두 셰프가 1대1 대결을 벌이는 것도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 주제를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웠는지 9화까지는 '한 냉장고의 재료로 대결' 과 '냉장고간의 대결' 시스템을 혼합하여 사용했지만, 이후부터는 과감하게 본래의 기획 방향을 버리고 한 냉장고의 재료만을 가지고 대결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는 지난학기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게임을 디자인하면서 배운  '심플한 아이디어가 반드시 먼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라는 교훈을 상기시킨다. 심플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심플하고 좋은 아이디어는 여러 테스트를 통한 발견과 수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이다. 현재 <냉장고> 의 재미는 최선의 게임 디자인을 위한 제작진의 끊임없는 고민과 실험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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