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9일 월요일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를 정말 오래 고민해왔지만, 학부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도 결론이 안 나고 있다. 그래도 몇 가지 발전은 있었다. 진로를 몇 가지 분야로 압축할 수 있었고, 각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학부 입학때부터 지금까지 진로에 영향을 준 일들을 정리해 봤다.

컴퓨터공학과 입학 -> 밴드동아리 가입 -> 군입대 -> 커뮤니케이션학 복수전공과 동시에 광고동아리 가입 -> 한국 퀄컴 인턴 -> 복학 -> 아트&테크놀로지 수업 수강


컴퓨터공학과에 온 것은 게임과 프로그래밍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  하지만 컴퓨터공학과 1학년이 학부에서 배우는 것은 지루했다. 커맨드 라인을 사용하여 문자열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아무리 짜봐야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알집같은 GUI 애플리케이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게임은 더욱 더 그랬다. 게임을 만드는 것과 이 학과에서 가르치는 것이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기타를 열심히 치기로 했다.  모든 수업을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 사이에 밀어넣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아현동 지하 레슨실에 가서 기타를 쳤다.

어린 나이에도 주워들은 건 있어서 나름 이런 전략을 세웠다. 전공은 취직할 정도로만 하고, 월급이 적더라도 널널한 직장에 취직한 후에 음악을 병행한다.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음악을 하는 거고, 아니면 계속 병행하면 된다. 일주일에 한 장씩 사는 로또처럼.

그리고 남들처럼 군대에 갔다. 그때쯤 컴퓨터공학과를 나와서 널널한 직장에 다닌다는 건 참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좀 더 재미있는 걸 하고 싶었다. 우리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엔 광고가 재미있어 보였다. 전역 후 커뮤니케이션학 복수전공을 했고, 광고공부를 했다.

광고는 확실히 재미있었다. 내가 만든 것이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이것이 광고의 매력이었다. 공모전에도 몇 번 응모를 하고 나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공모전의 1차예선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컴퓨터공학과에서는 가장 빡세다는 운영체제 수업을 들었다. 3학년 2학기였다. 그간 동아리 활동으로 바쁘다가 마침 이때 전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번 하는데까지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과제에 올인했다. 나는 C언어 기초조차도 불안했기 때문에 남들 1학년때 보는 책들을 펴놓고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그렇게 첫 과제때문에 추석 연휴를 홀랑 날려먹고, 마지막날 깨달음이 왔다. Linux에서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Doubly Linked List를 이해했다! 새벽 다섯시에 창밖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기쁨은 처음이었다.

다음 학기에는 영화제작 수업을 들었다. 과제 중 뮤직비디오 제작이 있었는데, 남의 노래 뮤직비디오 만들어주기에는 존심이 상해서 노래를 만들었다. 뮤직비디오 제작 2주동안 열흘이 넘는 시간을 노래 만드는 데 썼다. 그간 깨작대다 만 습작들은 많았지만 가사까지 붙여서 끝까지 완성한 건 처음이었다. Logic의 기본악기만 사용한 것과 처음인 것을 감안할 때 나쁘지 않았다. 신디사이저 사용에 재미가 붙었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퀄컴 인턴에 지원했고, 덜컥 붙었다. 사실 뭐 하는 곳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갔었다. 알고보니 관심있는 분야와는 거리가 다소 있었지만, 그래도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돈도 조금 모았다. 인턴이 끝나기 전에 처음으로 GUI프로그래밍에 도전해 봤다. .NET 프레임워크를 사용해서 툴을 하나 만들었다. 재미있었다. 내가 어릴 때 막연하게 동경하던 프로그래밍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EXE확장자를 가진 파일이 생겨서, 실행하면 여러가지 일을 하는 버튼과 창들이 나오고, 물음표를 누르면 개발자 정보와 연락처가 나오는, 사실 정말 중요한 프로그램의 core와는 별 상관없는 것이, 내가 동경하던 것이었다. "여러분! 제가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신디사이저에 관심이 있고, 프로그래밍을 전공했는데, 가상악기를 만들 순 없을까? Propellerhead사의 Reason처럼 멋진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는 없을까? 갑자기 광고가 마음에서 멀어졌다. 물론 광고도 재미있지만 이정도로 흥분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늦었다. 코딩도 이제 갓 시작한거나 다름없었고, 신호처리 쪽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알고보니 음악은 짧은 소리들의 집합이었고, 소리는 순전히 신호였고, 신호를 가지고 노는 건 전자공학에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따분하다고만 생각했던 전자공학이 갑자기 거대하게 다가왔다. 올해 초 복학해 DSP(Digital Signal Processing)을 청강했고... 좌절했다. 

동시에 우리학교에 신설된 아트&테크놀로지 학과의 수업을 몇 개 들었다. 모바일 프로그래밍이란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게임샐러드라는 툴을 사용해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안드로이드 .apk 파일로 만들어 갤럭시 탭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여러분! 제가 게임을 만들었어요!"

바쁘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게임인데 만들어 보니 재미있었다. 작곡을 할 때와 같았다. 조금만 몰입하면 어느새 해가 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오디오와 게임을 두고 고민중이다. 공통점은 창작을 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생 가상악기 개발회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사실 두렵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다. 학부 동기들의 대부분이 대기업에 입사한 가운데 홀로 다른길을 걷는 것도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이다. 삼성전자에 다니는 친구들이 많다보니 여태 연봉 액수를 들어도 무덤덤했는데, 내가 중소기업에서 시작하면 받게 될 연봉과 비교하니 새삼 놀라웠다. 이래서 다들 삼성 삼성 하는구나 싶었다.

우리나라 게임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국내 게임회사들이 만드는 게임은 내가 만들고 싶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같이 생긴 캐릭터들이 갑옷 입고 검 휘두르고 AK-47 쏘고 하는건 아무래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게임 쪽에서 하고싶은 걸 하려면 창업을 하거나 북미쪽에 취업을 해야 했다.

암튼 뭘 하고 살지 결정이 너무 어려워서, 일단은 결정을 운명에 좀 맡기기로 했다. 대학원 원서도 넣어보고, 입사지원도 하고 하다가 '되는 쪽' 으로 가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결정하지 않으면 도대체 시작을 못하겠다. 다만 한 가지 원칙은 있다. 하고 싶은 일 중에서 고른다는 것. 돈을 더 받는다고 내가 하고싶지 않은 분야의 일을 하면 내가 못 견딜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한다. 하고싶은 일 하면서 잘 먹고 살려면 정말 남들 몇배로 열심히 살아야겠더라. 왜 이제야 알았을까.

----



댓글 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