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일 금요일

배움과 편견: 차별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차별이란 무엇인가? 과연 차별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난 이 질문의 답을 작년 봄 머신러닝 수업에서 배웠다. 마지막 학기 수강신청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수업이 튕겨 머신러닝을 듣게 됐는데, 예상치 못하게 교수님이 정말 열정적인 분이었다. 왠만한 머신러닝 수업 같으면 이미 주어진 프레임워크나 툴을 주고 파라미터 튜닝을 하면서 이론을 가르칠 텐데 우리 교수님은 진도를 많이 빼는 덴 관심이 없고 숙제 하나하나를 정말 처음부터 다 학생이 프로그래밍하도록 시켰다. 학습 데이터와 테스트 데이터만 주고 코드는 파이썬이던 자바던 학생이 첫줄부터 다 써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뭐든지 다 찍어 먹어보고 데어 봐야 궁금증이 풀리는 나로선 좋으면서도 막학기라 너무 바빠서 반쯤은 정신 나간 채로 수업을 들었다.

울면서 숙제를 진짜 겨우겨우 하는데 한번은 Bias-free learning 을 하는 프로그램을 짜오라는 숙제가 나왔다. 대충 번역하자면 '편견이 없는 학습'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것.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은 별 생각 없이 숙제를 해 나갔다. 편견, 그러니까 마주한 정보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가정도 하지 않고 판단을 내리는 프로그램? 그거 좋아 보이는데? 그거 그냥 아예 아무런 데이터도 미리 입력 안하면 되는 거잖아.

결과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하지만, 프로그램은 아무것도 못 배운다. 테스트 데이터를 입력하면 랜덤 아웃풋이 나온다. 고양이랑 개 사진을 던져주면 이게 고양이인지 개인지 동물인지 책상인지 그림인지 객체인지 할튼 그 정보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거다. 아무것도 못 배웠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편견=배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편견 없이는 아무 것도 못 배운다. 어릴 때 부모님에게 받은 가르침, 학교에서 배운 것,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신체, 감각, 속해있는 물리적 세상, 이 모든 것이 크고 작은 편견으로 작용한다. 편견이 곧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고양이. 이것은 개. 이건 나쁜 짓. 이건 좋은 일. 이것은 나. 이것은 내가 아닌 것. 집합을 분류하고 나누면서 우리는 배운다. 난 이 당연하고도 단순한 ‘편견’의 실체를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편견이 없으면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 없다니? 교수님은 종종 "만약 여러분이 이 강의에서 단 한가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이걸 기억해라" 라고 하곤 하셨다.



그래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완전하게 차별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차별은 편견에서 비롯되고 우리는 개와 고양이, 여성과 남성, 백인과 흑인,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어떠한 편견을 가지고 분류를 하며 산다. 그게 이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사라져도 우린 키, 지능, 부, 체중, 지역, 교육, 스타일, 기호taste,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크고 작은 판단과 차별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럼 편견과 차별은 세상의 이치이니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 존재할 수 없을지라도 그걸 향해 나아가지 말란 법은 없다. 차별할 거리가 사라져서 키가 167cm인 사람이 166cm인 사람을 차별하는 날이 오면 그땐 또 그걸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 인류가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올린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는 원칙에 동의하는 한. 좀 이상주의적으로 보여도 하는 수 없다. 여기부터는 믿음의 영역이다. 내가 원래 이상적인 면이 있기도 하고.

다만 분류가 이성의 기본적인 원리라는 걸 이해하면 세상을 좀 더 너그럽게 볼 수 있다. 내가 미국에서 이주민, 유색인종으로 분류되고 취급되는 동안에도 나는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분류한다. 레드넥, 트럭커, 힐빌리, 알파메일 등. 진짜 문제는 그러한 분류가 얼마나 정확한지, 어느 집단이 얼마나 더 수혜/불이익을 받는지이다. 차별을 인식하고 보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신이 수혜자인 경우엔 예리한 자기인식을 할 수 있는 지능과 지식 그리고 방향성이 필요하다. 차별하는 사람에게 비난만 하는 것 보다는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는 게 생산적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들도 자신들의 편견으로 왜곡된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 딱한 처지인 것이다.

급진좌파, 종북, 중도보수, 무성애자, 범성애자, 퀴어, 신자유주의, 아나르코 생디칼리즘, 문신한 사람, 염색한 사람, 틀딱충, 급식충, 오렌지족, 니트족, 오타쿠, 그 누구도 분류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폭력적인 범주화나 틀린 분류에는 반발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자신이 뭔가로 정의되는 것 자체를 막을 순 없다. 90년대 청년들이 "난 나야!" 라며 분류를 거부하는 순간 그들은 엑스세대, 즉 '분류를 거부하는 자' 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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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 2017년 11월 30일자 페이스북 포스팅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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